언론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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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1. 1회 빛이 만들어낸 성스러운 생명력… 전통 등에 실용·미감을 함께 담다
  • 게시일 : 202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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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확산 2(Silent diffusion II), 200×210×230㎝, 스테인리스스틸, 스틸, 한지, 조명, 2009.

 


■ 지식카페 - 세계로 가는 K - 조각의 미래 - (1) 전영일의 등 조각

구름 · 여의주 · 물고기 등 20여 가지 문양 차용… 한지 위에 덧대거나 열처리해 미래 · 희망 등 기운 반영
기계 대신 모두 손으로 작업하며 존재의 근원 찾아… 서구와는 다른 한국인만의 원형질 탐색


이번 주부터 ‘세계로 가는 K-조각의 미래’를 연재합니다. 한국 미술의 세계화를 꿈꾸며 묵묵히 조각 작업을 해 온 중견 작가들을 조망하는 시리즈입니다. 매회 한 작가를 엄선하고 그의 작품 세계를 깊게 다룹니다. K-팝, K-무비 등과 맞물려 K-스컬프처(Sculpture), 즉 한국 조각을 세계 문화 현장에 적극적으로 알리겠다는 뚜렷한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기업 메세나에 힘쓰며 조각가들을 후원해 온 윤영달 크라운해태 회장이 위원장을 맡고 있는 ‘K-스컬프쳐 조직위원회’와 공동 기획을 했습니다. 매회 선정된 작가에 따라 다른 필자가 나서 한국 조각의 고유성, 독창성을 규명하는 글을 펼칩니다. 미술계 정상급 필진이 이어가는 새 연재에 독자 여러분의 기대와 성원을 바랍니다.

 

전영일의 ‘등(燈)’ 조각은 우리네 전통으로부터 비롯했다. 세속을 떠나 있던 시절, 사찰에서의 일상은 청년 조각가 전영일에게 전환의 공간이자 결정적 시간으로 작용했다. 신세계와도 같았던 전통 ‘등’ 작법과 소통 가능성은 서구식 조형 어법을 강요받던 미술대에서의 답답함과 갈증을 돌아보고 극복하는 매력적인 계기가 되었다.

 

제도권 교육 틀 안에서 접할 수 없었던 전통 등이 자아내는 ‘빛과 밝음’은 조형적 가능성을 넘어 ‘희망 표상(表象)’이었다. 빠르게 익혀나간 전통 등의 환상적 화법(話法)은 깎고 빚는 물질과의 건조하고 관성적인 싸움으로부터 ‘물질 너머’ 세계로의 알레고리적 전환을 가능케 했다. 빛과 밝음을 향한 ‘비(非)물질’적 지향과 ‘범(汎)자연성’이라는 새로운 창작 동인은 전영일의 ‘등 조각’을 향한 평생의 성취동기로 작용했다.

 

고대신화라든가 종교, 무속, 원시부족사회에 있어 빛과 불, 밝음은 신, 무속인, 제사장이 능력을 드러내는 도구이자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확인시키는 통로였다. 불교미술이나 성화(聖畵) 등에서 볼 수 있는 두광(頭光)이라든가 신광(身光), 헤일로(halo)라고 부르는 광륜(光輪), 혹은 후광(後光) 등은 모두 신성, 성스러움, 신묘한 기운을 강조하는 상징적 외화였다. 이처럼 불과 빛이 만들어내는 밝음은 부정한 것, 잡스러운 것을 물리치고 선한 것을 지키려는 강한 의지이자 생명력의 원천이었다.

빛은 예술창작의 주요 모티프다. 작가는 빛을 통해 사물의 크기나 색깔, 형태 등과 같은 시각 정보를 객관적으로 취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예술실천이라는 일종의 지적성과를 창출한다. 조각의 경우 사물의 모상(模像), 즉 그림자를 실제적으로 자아내며 물리적 실재감을 효과적으로 창출했다. 회화의 경우도 빛이 있었기에 음영을 통한 물체의 입체적 표현이 가능했으며, 인간 내면의 감정과 이런저런 징후들을 극적으로 연출할 수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밖으로부터 안으로 깎아 들어가며 덩어리 속 원하는 형태를 끄집어내는 형식을 조각(彫刻)이라 한다. 반대로 안으로부터 밖으로 무언가를 더해가면서 바라는 형상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은 소조(塑造)라 한다. 조소(彫塑)라는 말은 이 둘을 합친 것이다. 따라서 등 조각은 엄밀히 말해 조각이라기보다는 소조 형식에 가깝다. 조각, 소조 모두 사물에 그리고 사물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획득하지만, 한 땀 한 땀 더해지는 작가의 땀과 호흡 그리고 빛이 하나 되어 창발(創發)하는 한국 전통 등 조각의 생명력은 가히 압권이다.

 

밖에서 불을 비추는 서구의 빛 조각과는 달리 한국 전통 등 조각은 형상 속에서 빛을 발하는 것으로 존재의 근원을 돌아보게 한다. 저마다의 색깔과 형상 그리고 일정한 볼륨, 양괴감(量塊感)을 갖는 전영일의 등 조각은 예술이 인간을 숙주(宿主)로 하듯 구체적인 틀, ‘등’을 숙주로 한다. 실제 크기를 압도하는 물리적 현존감과 살아 꿈틀거리는 듯 생생한 기운은 전영일이 빚어내는 특유의 총체적 미장센(mise-en-scene)이자 살아 움직이는 서사(敍事)다.

 

등 조각은 형상이 상대적으로 강조되어 보이지만, 전영일의 등 조각은 빛과 형상이 물심동체(物心同體)로서 존재한다. 형상 틀, 지지체가 단순 숙주 개념으로 기능하기보다는 빛과 더불어 세상을 향해 발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상조(相助)적으로 기능하며 역할이 분담되거나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일부 작품은 물리적, 심리적으로 움직이는 등 열린 시공간에서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보다 적극적인 구조를 취한다. 전영일의 등 작업이 일종의 키네틱(kinetic)하고 옵티컬(optical)한 특성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기는 물론 새로운 대체 에너지의 보급과 외국 문화의 실시간 유통으로 우리의 등 문화는 위축되거나 축소, 혹은 시나브로 사라지고 있다. ‘K-컬처’ 등 한국 문화와 전통에 대한 관심이 세계적으로 환기되면서 잊고 있었던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도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 전영일이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이어오고 펼쳐온 등 작업은 소중하고 값지다. 한국 전통의 세계화는 물론, 예술산업적 차원에서 ‘등’ 문화에 대한 전령의 역할을 대내외적으로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전통 등 작업을 하는 작가는 적지 않지만, 현대적 해석과 미감으로 작업하는 작가는 그리 많지 않다. 현대조각을 전공하고 오랜 시간 전통 ‘등’에 천착한 전영일의 호흡이 귀하고 빛나는 이유다.

 

산보(Stroll), 120×100×40㎝, 스틸, 스테인리스스틸, 한지, 조명, 2015.

 

오늘도 전영일은 흙을 붙여나가듯 수백 장의 색지와 한지, 후지(厚紙)를 한 땀 한 땀 붙여나간다. 살점을 더하듯 덧댄다. ‘등’과 함께 호흡한 지난 시간을 반추(反芻)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기억 저편으로부터 끄집어내듯 더하며 새긴다. 삶의 희로애락과 세속의 오욕칠정(五慾七情)을 걷잡는 자기 치유 과정이기도 하다. 불을 은은하게 감싸 안는 색종이와 한지는 이를 소중히 여기는 우리네 민족적 성결을 돌아보게 한다. 가장 한국적인 빛이 세상의 빛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까. 그가 발하는 불빛은 아름답고 은은하다. 한지, 색지 등 전통과 함께 호흡하며 어우러진 은근하고 차분한 빛이다. 우리식 등불을 마음속에 밝히고 세계만방에 널리 알리고자 하는 작가의 마음이 오롯이 우러나고 있음이다.

 

전영일이 등 조각에 녹여낸 정신과 조형적 기운은 이처럼 은은하고 넉넉하다. 노을 같은 세월, 보는 이에게 지난날을 차분하게 돌아보는 반성적 시간과 경험을 제공한다.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옛이야기 속 주인공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의 작업이 설화적이고 유희적이며 교육적이기도 한 이유다. 전영일의 작업이 따뜻한 느낌을 주는 것은 ‘등’을 품고 있어서일 수도 있지만, 이렇듯 역사, 전통, 미래, 희망, 건강한 자기 투영의 기운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영일은 미세하게 울퉁불퉁한 ‘등’의 표면을 과하지 않게 입체화하는 장식 문양으로 구름문, 여의주문(如意珠文), 물고기문, 화문(花文), 물결문 등 20가지가 넘는 전통 문양을 선택적으로 적용한다. 전영일이 선택, 적용하는 이들 형식과 문양은 한지의 표면에 직접적으로 더해지기도 하고 작품 속에 스미기도 한다. 한편으론 열처리한 밝고 누런 색감의 스테인리스스틸 골조를 작품 외부에 더하기도 하는데 이는 작품 속에 투영된 심리지형을 강조하거나 물리적 역동성을 부여하려는 일종의 조형적 얼개로 이해된다. 자칫 관성적이고 건조할 수 있는 형상 중심의 등 조각에 회화적 선묘(線描)로서 긴장감과 동적 기운을 부여하는 특유의 호흡이다. 이들 모두는 한국 전통문화가 기호화된 신화로서 혼연일체로 작품에 스미듯 녹아 있다.

 

매사 워낙 민완(敏腕)이지만, 오월이면 전영일은 더욱 빨라지고 가빠진다. 이른바 부처님오신날, 음력 사월초파일을 전후해서 전영일은 가장 분주한 시간을 보낸다. 연등행사와 전국 주요 사찰의 불교행사에 전영일의 조각이 집중적으로 소개되는 달이기 때문이다. 창작의 산실인 공방은 더욱 뜨겁고 가쁘다. 두드리고 잘라내고 이어붙이는 분주한 손과 용접 불꽃, 숨, 호흡들로 가득하다. 대부분의 공정은 기계의 도움을 받지 않고 모두를 직접 두드리고 붙여나가는 수공 과정을 거친다. 일부 원하는 색감과 표정을 구하기 위한 열처리 과정도 이어지는데 스테인리스스틸의 경우, 과열하면 원하는 구릿빛이 아닌, 니켈 성분이 올라오며 색깔이 생경하게 바뀌어버린다. 재료와 작가의 섬세한 호흡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 긴장의 순간이다.
 

 

단조 과정 역시 애써 도입한 기계단조를 피하고 모두 손으로 작업한다. 기계화된 세상에서 쉽지 않은 고집이자 지난한 과정이다. 광택을 내거나 지나치게 매끈하게 다듬지 않는다. 최근 작업에서는 한지 표면에 입힌 ‘UV’(자외선 차단) 안료에 반응한 빛이 환상적인 그러데이션(gradation) 효과를 창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키네틱에 이은 옵티컬한 관심이 반영된 것으로, 끊임없는 실험을 이어가는 전영일의 연금사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회화적인 분위기를 강조한 작업으로 설치 이후 관객의 반응이 기대된다.

 

 

박천남 2023 한강조각 프로젝트 예술감독

■ 전영일 조각가

전통등기능전승자로 홍익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했다. 국내외에서 8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다수의 그룹전에 출품했다. 현재 파주시에서 ‘전영일공방’을 운영하고 있으며 평화예술교류협회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등(燈)’ 조각가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져 있는 전영일의 작업은 우리의 전통 ‘등’이 지닌 미감과 실용을 오늘에 재현하는 일이다. ‘등’ 이야기, 시연, 완성기 등을 출판하거나 전시, 교육, 체험 프로그램을 국내외적으로 공유하며 우리네 전통을 미래적, 세계적으로 전승, 보전하려는 미학적 탐색과 지적 실천을 멈추지 않고 있다. 전영일이 재현하는 등의 형식은 다양하지만 주로 동물등, 물고기등, 식물등, 기물(器物)등과 같이 구체적 형상을 띠는 전통 형식들이 대부분이다. 인공지능(AI) 시대 전통 작가 전영일. 파주시 북단에 자리한 그의 작업실은 오늘도 뜨겁다. 전영일공방은 전통을 통해 분단시대 통일한국을 예비하는 앞걸음을 내딛는 산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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