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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1. 8회 나뭇가지 깎고 또 깎으며 수행… 치유에 도달하기 위한 인고의 예술
  • 게시일 : 2023-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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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바람부는날, 회양목, 실크실, 레진, 아크릴채색, 60×120×130(h)㎝, 2013.



■ 세계로 가는 K-조각의 미래 - (8)자연과의 물아일체 이상섭

몇 달이고 목적없이 반복하면
무의식중에 조각하며 마음 비워

자연은 지배의 대상 아닌
내면의 안내자이자 감정의 흐름

새로운 예술적 재료는 ‘동’
힘의 강약따라 감성 묻어나

 

photo서희정 성신여대 연구교수(미술사학자)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한 존재를 중생이라 한다. 중생들은 복잡한 마음인 번뇌와 망상을 안고 살아간다. 때로는 현실에 대한 욕망으로, 때로는 타인에 대한 미움으로 잡념과 정신적 갈등이 마음에 가득 차면, 눈에 보이지 않는 탁한 공기가 무겁게 드리워지게 된다. 번뇌와 망상의 숫자를 헤아리면 팔만사천이고 팔만사천을 줄이면 백팔번뇌라고 한다. 그래서 불교에선 번뇌를 벗어나기 위한 수행으로 종일 108배, 혹은 1000배의 절을 하는 수련 과정이 있다. 앉았다 일어나는 동작을 108번 이상 반복하는 일은 쉽지 않다. 편히 쉬고 싶은 나의 욕망을 비워내고 인내해야 한다. 그러나 점차 자신을 힘들게 하던 잡념이 사라지고 마음의 탁한 공기가 걷어지면서 정화되는 느낌이 찾아온다. 세상의 상처가 치유되고 마음의 평화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 이상섭의 나뭇가지 작업은 ‘수행(修行)’의 흔적이다. 이상섭은 나뭇가지를 한가득 작업실로 주워와 몇 달이고 끌로 나뭇가지의 껍질만 계속해 하나씩 벗겨내고 벗겨낸다. 목적 없이 반복하다 보면 무의식중에 손이 움직이며 껍질을 벗기고 있다. 그 순간 복잡했던 생각이 비워지면서 마음이 맑게 치유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뭇가지의 껍질을 벗겨내는 무한 반복으로 자신의 존재를 잊게 될 즈음, 나무의 향기에 취하며 어떤 평온한 감정에 도달하게 된다. 나뭇가지로 하는 작업은 그에게 무위(無爲)를 향해 수도자처럼 마음을 수양하는 과정과 같았다. 그래서 이상섭은 자신의 작품에 있어 시각적 조형물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며, 나뭇가지의 껍질을 반복적으로 벗기는 행위를 통해 도달하게 되는 감정의 치유가 자신의 예술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photo순수(부분), 순동,150×160×180(h)㎝, 2021.



나뭇가지로 작업하게 된 것은 어떤 계기였냐는 질문에 작가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미술을 하고 싶어서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무엇을 그려야 할지 막연해져 하루하루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 그때 나뭇가지를 만났다. 우연히 땅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이것을 주워서 작업대로 가져와 끌로 껍질을 아무 생각 없이 벗겨봤다. 그러다가 점차 그냥 껍질을 벗기고 벗기는 반복된 행위에 집중하게 되었다. 근심과 걱정이 점차 마음에서 사라지고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후 무엇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 없이 나뭇가지를 마구 주워왔다. 그리고 몇 개월 동안 계속 껍질을 반복해서 깎고 벗기도 또 깎았다.”(이상섭 작가, 작가노트) 껍질을 벗긴 나뭇가지들이 수북이 쌓였고, 이것들을 모아 얼기설기 엮어 만든 첫 작품이 2009년에 제작한 ‘Love’다. 이 하트모양 조형물은 껍질이 벗겨진 나뭇가지의 더미를 엮어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로 드러내고 싶어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의 수행의 시간과 흔적이 물질로 표상된 것이다.

2009년부터 2018년까지 계속해 나뭇가지들을 작업실에 모아와 껍질을 벗기고 벗겼다. 나무가 자연의 기운에 맞춰 자라듯 마음과 감정이 가는 대로 나뭇가지를 쳐가며 형태를 만들고 또 벗겼다. 무한 반복의 행위를 통해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갈 즈음엔 쭉 뻗고 있는 나뭇가지의 흐름에 감정을 맡길 수 있었다고 한다. 작가 자신과 나뭇가지가 하나가 된 것이다. 그에게 나뭇가지는 자신이 지배하고 조정하는 대상적 오브제가 아니었다. 수행(修行)의 안내자였으며 쭉 뻗은 흐름은 바로 이상섭 자신의 감정의 흐름이었다. 바로 여기에서 주체와 대상이 분화되지 않고 합치된 동양의 범자연주의적 사상이 보인다. 한국화의 많은 작품을 보면 작가들은 자연과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나눠 지배자라는 위치에서 자연을 바라보지 않는다. 주체인 작가 자신이 소멸해가면서 자신과 자연이 하나로 어울리는 시점을 찾고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가치를 지향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상섭의 작품 역시 한국적 미학에 맥이 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photo시간의숲, 백일홍나무, 삼지닥나무, 150×150×240(h)㎝, 2013.



2013년부터 이상섭은 자신의 인체를 모티브로 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과 미소 짓는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건 ‘마음의 상처와 치유’란 주제를 한층 새롭게 모색하고자 한 것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휘날리면 마음속 깊이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고 모든 걱정이 함께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눈을 감으면 바람과 일체가 돼 자연이라는 무한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상섭은 나무껍질을 벗기는 반복의 행위를 좀 더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다 껍질을 벗긴 나뭇가지 위에 실을 반복적으로 감아봤다고 한다. 반복적으로 실을 감는 행위를 통해서도 내면의 불안이 덜어지고 정서가 순화되는 것 같았다. 이런 감정을 느끼고 인지하게 되는 곳을 뇌라고 생각한 이상섭은 껍질을 벗겨 놓은 나뭇가지에 실을 칭칭 감은 후, 그 나뭇가지로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형상화했다. 바람에 날리듯 공중에 떠 있는 머리카락의 형상을 보는 관람객들은 눈앞에서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는 착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상상의 바람으로 시원스레 번뇌가 씻겨가고 평온이 찾아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같은 시기 나뭇가지를 엮어 모아 만든 사슴 형상의 작품이 있다. 나뭇가지는 긴 사슴뿔의 형상으로 공중을 향해 뻗어 있기도 하고, 사슴의 긴 목과 긴 네 다리는 각각 원통형으로 얽혀 이어져 있기도 하다. 많은 나뭇가지의 뻗침과 흐름 중 감정에 와 닿는 것을 순간순간 골라내 껍질을 벗긴 것을 덤불 형태로 모아 다년간 발표한 ‘Emotion’ 시리즈(2009-2013)를 보면 그의 감정과 수행의 흔적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엮은 사슴의 모티브는 무엇인가? 사슴을 나뭇가지로 제작하게 된 동기가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이상섭은 사슴은 인간에게 조력자의 상징이고 자신의 조력자이기도 하다고 대답한다. 한국의 고전소설 ‘선녀와 나무꾼’에서 사슴은 나무꾼의 소원을 들어주는 조력자로 등장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염원할 때 자신의 곁에서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고 응원해주는 상상의 조력자를 마음에 그려보기도 한다. 이상섭은 자신의 예술작업의 다음 방향을 모색할 시기에 예술적 영감을 빌어주고 응원해줄 조력자가 필요했고 사슴이 떠올랐다. 나뭇가지를 엮어가며 조력자가 될 사슴의 형상을 만들면서 소원을 빌어 보기로 했다. 따라서 껍질을 벗긴 나뭇가지로 사슴의 형상을 엮는 작업과정은 그에게 일종의 ‘소원을 비는 의식’과 같은 것이었다. 몇 년 후 그의 사슴은 소원을 들어줬는지 이상섭은 ‘동(銅)’이라는 새로운 재료에 영감을 얻게 됐다.

이상섭이 ‘동’이라는 재료로 새로운 전환점을 찾은 것은 2019년 겨울 즈음이다. 이상섭은 먼저 한가득 모아 온 회양나무, 백일홍나무, 삼지닥나무, 참나무 가지들을 살피며 감정이 이끌리는 나뭇가지를 찾았다. 그는 나뭇가지의 뻗침과 흐름이 나무마다 다르다고 설명한다. 회양나무와 백일홍나무는 자유롭게 중구난방 뻗쳐나가듯, 삼지닥나무와 참나무는 위를 향해 곧고 가지런히 뻗쳐 있다. 그러나 나뭇가지의 형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은 나뭇가지다’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던 나뭇가지의 전형적인 형태는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이게 나뭇가지였나 싶은 형태도 있었다. 나뭇가지라고 기대했던 모양은 세상엔 없는 나뭇가지의 이데아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상섭은 직접 자신의 감성의 기운을 따라 뻗어 나오는 나뭇가지를 만들어 보고 싶어졌다.
 

photo순수, 백일홍나무, 150×100×250(h)㎝, 2015.



‘동’은 자신 있게 다룰 수 있는 재료였고 두들기거나 자를 때 힘의 강약에 따라 자신의 감성이 물성에 그대로 묻어난다고 느꼈다. 동으로 만든 나뭇가지야말로 작가의 마음 안에서 감정의 기운을 타고 밖으로 뻗쳐나온 나뭇가지의 이데아인 것이다. 무언가를 보고 재현한 것도 아니고,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나뭇가지의 형태이자 그의 감성의 흐름 그 자체였다. 동판과 동파이프를 절단하고 두들기고 반복용접을 하면서 마음 안에서 뻗쳐나오는 나뭇가지의 기운을 느꼈다. 순간의 감정을 투영해 어떤 때는 강하게, 어떤 때는 약하게 두들기면 동파이프에 감정이 묻어나 나뭇가지로 뻗쳐나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반복해서 두들기고 용접할 때 역시 세상의 잡념이 다 사라지고 마음이 정화되면서 평온이 찾아왔다. 이상섭은 수많은 나뭇가지를 모아 자신의 감성이 통하는 나뭇가지를 찾아보고자 했던 관찰자에서 이제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리던 나뭇가지를 꺼내는 생성자로 거듭난 것이다.

이상섭의 나뭇가지 작품은 시각적 조형 너머의 의식을 봐야 한다. 그의 제작과정은 반복과 인내를 통한 ‘수행의 과정’이고, 조력자인 사슴을 만들며 ‘소원을 비는 의식’과 같은 것이었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그는 세상의 잡념에서 벗어나 감정의 치유를 추구했다. 감정의 흐름을 따라 동을 두들기며 순간순간 뻗쳐가듯 만든 나뭇가지는 그의 제스처의 지표지만,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의 대가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과는 또 다른 한국적 범자연주의 사상을 깔고 있다. 나뭇가지의 생태적 기운에 자신을 잊고 몰입하는 물아일체의 과정은 한국적인 미적 공감대를 형성하며, K-Culture의 시대를 대표하는 한국의 현대 조각예술로서 그의 작품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서희정 성신여대 연구교수(미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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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섭 조각가는

1980년생으로 경원대 환경조각과에서 학부와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2013년 오!재미동 갤러리의 초대개인전 ‘집적(集積)’을 시작으로, 2014년 제4회 성남문화재단 신진작가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특유의 나뭇가지를 사용한 작품을 선보였다. 이후 남도문화재단 선정작가상 등 다수의 공모전에서 최우수상과 특선을 수상했고 최근에는 2023년 한강조각프로젝트에 참가하는 등 다수의 초대개인전과 단체전에 참가해 오고 있다. 2014년에는 에꼴드 아미 레지던시 4기 입주작가로 활동했고, 크라운해태, 성남문화재단, 미누현대미술관, 당림미술관, 수호림미술관, 세진전자, 동부산롯데물 등에 소장돼 있다.
 

photo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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