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장근의 2005년 작품 ‘기도’. 340×200×190(h)㎝, f.r.p.
■ 지식카페 - 세계로 가는 K-조각의 미래 (3) ‘사람’을 조각하는 박장근
‘기도’ 통해서 종교적 비전 보여주고 ‘꿈의 비클’엔 바퀴 달고 비상을 위해 전진하는 남성 담아
인간 전체를 은유하는 신체 기관으로 손에 주목… 만남 · 합일 · 약속의 의미로 표현
박장근의 출발은 인간이다. 2011년 개인전 부제가 ‘인간을 말하다’이기도 했다.
현대미술에서 재현과 표현이라는 미학적 개념이 도전받은 후, 인간은 현실과 마찬가지로 예술의 자명한 출발점이 되지 않는다. 인간의 위상이 흔들리고 인공지능(AI)의 등장으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 거세지고 있는 가운데 인간에 대해 연구해온 박장근의 작품은 인간의 경계도, 인간의 관계도 모호해진 현실을 배경으로 한다.
박장근은 강원 홍천에서 1968년 태어났다. 그에 관한 글을 태생에 관련된 소개로 시작하는 것은 그의 삶과 작품의 긴밀성 때문이다. 당시 그의 고향은 시골이어서 미술학원은커녕 가게도 한 군데밖에 없는 오지 같은 곳이었다. 박씨 집성촌에는 1970년대 말 그가 초등학교 다닐 때 전기가 처음 들어왔다.
박장근의 2008년 작품 ‘꿈의 비클’. 430×54×117㎝, 나무, 철, 스테인리스스틸.
촛불로 불 밝히던 동네에 형광등이 처음 들어왔을 때 감수성 예민한 소년이 받았을 충격은 컸을 것이다. 정전도 많았고 안테나로 수신하던 텔레비전도 잘 안 나올 때가 많았던 시공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의 감성은 거의 태어나면서부터 스마트폰을 접하는 요즘 세대와는 차이가 있다. 기술로부터의 소외는 이후에도 완전히 극복되지 않고, 작업과 자의식에 영향을 준다. 마침 뒤쪽이 산인 작업실을 지으면서 예술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인 잃어버린 시간 찾기가 본격화됐다. 그것은 단지 한 개인의 특수성을 넘어, 인간이 자연과 함께해온 더 오랜 시간들에 대한 격세유전(隔世遺傳)적 기억이다. 그의 예술적 모국어는 흙을 가지고 놀던 감성이며, 자신과 하나가 된 이 어법은 자연스러운 표현을 가능하게 했다. 입체화됐을 때 느낌은 직접 손으로 해서 가능하며, ‘눈이 흡족할 때까지 물질과 교감’한다. 최근 작품에는 나뭇가지 같은 실제 자연물이 구성요소가 되면서 자신의 뿌리와 더 깊이 접속하게 됐다. 의식적 차원을 넘어서 무의식의 원천까지 요구하는 예술에서 조형적 모국어는 중요하다. 새로운 기술에 비교적 개방적인 한국 사회에서 어느 시점부터 조각도 디지털 도구를 많이 활용하는 변화가 일어났지만, 본인의 육감과 관련된 작업은 여전히 중심에 놓인다.
전기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 힘든 현재, 조각가와 관련된 최초의 행위는 논바닥의 진흙을 퍼와서 인물상을 만들려던 시도였다. 평소에 흙을 가지고 잘 놓았고 친구들 공책 앞뒷면에 만화 주인공을 그려주던 박장근은 중학교에 가서 본격적 미술 수업을 받는다. 그의 작품에서 인체의 비율이 작품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것은 1980년대에도 번성했던 만화를 비롯한 대중문화의 영향을 생각하게 한다. 미술학원이 없던 고향에서 아카데미 형식의 고대 조각상보다는 만화 캐릭터를 먼저 접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학생이 되어 마침 미술 선생님이 조각 전공이라는 점이 행운이었다.
사람을 조각으로 만들고 싶었던 그는 고등학교 미술부에 들어가 강원도 실기대회에서 금상을 받으며 진로가 자명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고2 때 미술부를 그만두고 신학대 진학을 생각할 만큼 진지했다. 그러한 심성은 승화나 합일에 대한 지향이 작품에 스며들게 했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은 단지 인간을 넘어서는 것이다. 실제 진학은 영문과를 택했다. 하지만 채 1년이 되기 전에 미대 진학을 결심한다. 1년 정도 준비해 홍익대 조소과에 입학한 때가 1989년이다. 길지 않은 청춘기에 진로에 대한 ‘혼선’이 있었지만, 예술은 그 모든 것을 낭비가 아닌 거름으로 받아준다. 1990년대에 미술대학을 다니던 그는 당시의 사회운동에도 관심을 뒀다. 그의 생각에 ‘예술은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구본주(사망) 등 학교 선배 중에도 사회운동을 하던 작가가 꽤 있었다. 하지만 당시 진보주의의 정치적 전망과 일치되기보다는 다소간 실존적 선택을 한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 형상 조각 흐름의 한 축을 이루기도 한다. 그의 초기 작업 중 나이트클럽의 둥근 원 안에서 춤추는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진정한 자유를 묻고, 머리끝이 잘린 소시민의 모습에서 보이지 않는 유리 천장을 표현한다. 2004년 ‘소시민의 삶 이야기’라는 부제로 열린 첫 개인전에서 그는 ‘limit’ ‘주어진 공간에서의 자유’ 등의 작품을 통해 주어진 한계 내에서 복닥거리는 소시민의 상황을 연극적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인간을 보는 그의 관점은 묵직하다. 작품 ‘침전’(2003)은 경기 이천의 작업실 외벽에도 붙은 작품으로, 농민들이 볍씨를 물에 띄워 알맹이와 껍데기를 구별하는 것에서 영감 받았다. ‘껍데기는 가라’는 신동엽 시인의 시어도 있듯이, 알맹이는 인간이라는 작가의 관점이다.
박장근의 2013년 작품 ‘영원한 약속’. 45×23×88(h)㎝, 브론즈.
2006년 세종문화회관 광장에서의 제2회 개인전은 드넓은 장소에 걸맞은 내용과 형식을 펼친다. 당시 야외 계단 중간에 설치돼 강력한 효과를 보여준 작품 ‘기도’는 가부좌를 틀고 명상하는 사람을 통해 종교적 비전을 보여준다. 산맥과 중첩된 인간의 모습은 첫 개인전의 소아(小我)에서 대아(大我)의 시야로 상승한다. 초월을 위한 조건은 합일과 비상, 전진, 꿈 등이며, 2008년 제3회 개인전의 주요 경향이다. 특히 작품 ‘꿈의 비클’(2008)은 나무와 금속이 두루 사용된 작품으로 2차로 도로를 막을 정도의 길이로, 아래 바퀴를 달고 비상을 위해 전진하는 듯한 남성이다. 여성인 ‘꿈꾸는 기둥’(2008)의 경우 나무의 결을 살려 깎은 인체는 근육질이며 머리를 대신한 초승달은 신화적이다. 제3회 개인전 무렵부터는 다시 개인적 차원으로 돌아온다. 나무로 깎은 작품 ‘훈장’(2008)에서 왼쪽 가슴에 붙인 것은 딸이다. 소중한 딸의 초상을 가슴팍에 단 남자는 훈장을 받을 만하다.
그의 작업실에는 모형처럼 작게 만든 작품이 매우 많은데, 다른 기술적 도움으로 확장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 것이다. 그의 작업실은 모형을 주로 만드는 방과 그것을 키우는 방으로 구별돼 있다. 5m 작품도 가능한 7m 높이의 천장은 그간의 작업 규모를 가늠하게 한다. 오는 12월 서울 인사동에서 전시할 작품은 이전 전시 규모에 비하면 작은 편인데, 앞으로 컴퓨터 기술과 접목해서 규모를 키우는 것이 관건이다. 요즘 사용하는 자연물은 크기가 제한되어 있기에 기술의 도움이 더욱 절실하다.
기계 복제(박장근의 경우에는 복제를 통한 확대) 기술, 요컨대 손적인 기술과 달리 코드가 개입되는 기술은 어느 순간 문턱이 낮아질 수 있다. 그의 조각적 기술은 동료들이 먼저 알아줘서 그동안 수많은 협력 작업을 해왔다. 1998년 졸업하자마자 MBC 한국구상조각대전에서 우수상을 타고, 2001년 경기도 청년 작가 야외조각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는다. 2004년에 홍익대 대학원에 입학하고 그해 첫 개인전을 연다.
미술계에서는 세종문화회관 앞 광장을 꽉 채운 개인전에서 정점을 찍은 대작 스타일의 작업으로 깊이 각인됐다. 하지만 대작 스타일의 조각 전시는 많은 노력과 희생이 요구된다. 전업 작가로서의 길이 노동(일)과 함께 가는 점은 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각판에서 조각과 관련된 일로 부업을 했지만, 임금을 떼이는 일이 다반사여서 결국 그만두게 된다.
개인전의 간격과 상관없이 그는 작업을 한시도 쉰 적이 없다. 모든 것을 구경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디지털 문화가 몸을 수동화시켰어도 그의 손은 녹슬 시간이 없었다. 현대미술의 개념화를 비롯해 디지털 문화의 급속한 확산은 조각의 정통적 문법을 주변화시키곤 했다. 그전에 근대 이후 인간 위상의 변화가 있었다. 그는 인간을 대변하는 손을 자주 표현했다. 손은 여러 개인전에 걸쳐 고루 나타날 만큼 그에게 중요하다. 손은 인간이 직립을 통해 대지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노동과 예술을 가능하게 한 진화론적으로도 중요한 신체 기관이다. 작품 ‘선서’에서는 다섯 손가락이 모두 인체 상일 정도이다. 박장근의 작품에서 손은 만남, 합일, 약속 등을 의미하며 박탈감을 주는 빈손이나 날개 모양의 손 등으로 변신한다. 눈만큼이나 인간의 대표 기관인 손은 팬터마임처럼 연극한다. 작품 ‘혁명의 바람’(2014)은 손가락 전체가 어딘가를 가리킨다.
청년 시절 사회에 대해 관심이 컸던 그는 노동하는 주체가 혁명의 주체인 시대를 통과했다, 작품 ‘당당한 인생길’(2012)은 사람들끼리 손을 잡고 유대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손은 극적인 변화의 증명이기도 하다. 작품 ‘영원한 약속’(2013)은 새끼손가락으로 약속하는 모양새지만 동시에 결합된 손가락들은 마치 DNA 구조처럼 나선형으로 올라간다. 손이라는 부분을 통해서 인간 전체를 은유하는 위상 속에서 나선형 도형과 결합된 손의 형태는 인간과 구조 간의 긴장 관계를 보여준다.
이후에는 도형 대신 나뭇가지가 결합한다. 나뭇가지 이전에 꽃과 결합된 인체가 있었다. 10여 년 전의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들은 온몸에 꽃을 피우는 사람을 표현했는데 작가는 그것을 무명이라고 생각된 자신과 비교했다. 원래 제목은 ‘무명화’였지만, 보다 긍정적인 제목으로 고쳤다. 작업에 온몸을 불사르는 열정은 작가의 몫이지 대중에게 강요할 것은 아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 꽃도 아름답다는 메시지였지만 사실적인 꽃이 아니었기에 조형적 한계가 왔다.
박장근이 선택한 나뭇가지들은 자연이 굳이 변형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나뭇가지가 갈라지는 모습은 매우 다양하다. 그의 작품에서 혈맥과 연결된 나뭇가지는, 정맥의 배치가 인증기호로 사용될 만큼 다양함을 암시한다. 요즘 작업에서 보이는 자연물과의 접합에 대해 작가는 ‘첨단 스트레스에 대해 휴식 같은 작업’이라고 말한다. 도시에서의 탈출은 2005년 이천으로 이주하면서 본격화됐다. 뒷산에서 수집해온 나뭇가지들이 애용됐다. 실제 나무를 사용하기도 하고 그것을 모델로 주조하기도 한다. 브론즈 캐스팅한 자연물은 썩거나 부러지지 않는다. 자연은 단순히 소재로 대상화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어린 시절 무섭게 느껴졌던 산신제 때의 성황당을 떠올린다. 작품 제목인 ‘맥’처럼 인간에게도 같이 맥동하는 기(氣)에 대한 공감이다. 인간과 자연의 접속을 꾀하는 요즘의 작품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경외하던 시대로의 회귀가 진정한 진보임을 깨닫게 한다.
이선영 미술평론가
■ 박장근 작가는
박장근 조각가는 ‘구상 조각’(그는 1998년 한국구상조각대전에서 우수상을 타기도 했다)을 넘어 확장된 의미의 인간을 통해 서사를 이끈다.
그가 작품의 중심에 놓는 인간은 신적 위상과 관련된다. 인간 소외란 해방을 염두에 두는 것으로 지금 여기를 초월하는 이상적 비전을 요구한다. 그의 인체 상에서 위를 향한 자세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다. 그의 작품은 형태가 납작하게 눌려 있을 때조차 영웅적이며 기념비적인 위상을 잃지 않는다. 그의 ‘인간’은 인간이라는 중심이 상실된 이후에 다시 중심을 잡아가기 위한 여정에 있는 ‘인간 이후의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1968년 강원 홍천에서 태어나 홍익대 미술대학 조소과와 동 미술대학원을 졸업한 박 작가는 경기 이천의 작업실에서 예술혼을 불태우며 이천미술협회 회장, 이천국제조각심포지엄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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