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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 꿈의 배에 홀로 남은 표류자 ‘낙타’… 한편의 연극을 새기다
  • 게시일 : 2023-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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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고리 Ⅱ, 2023, 그라우트에 아크릴릭, 철, 550×550×210㎝,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설치. 작가 제공



■ 세계로 가는 K-조각의 미래 - (5) ‘서사’를 조각하는 임승천

비판·마술적 리얼리즘 섞고
장편서사 더한 ‘신형상조각’

전시 전 시나리오부터 구상뒤
스토리에 따라 조각적 연출

단편집 같은 ‘네 가지 언어’
중편 같은 ‘잃어버린 고리’등
인간의 심연 생생히 드러내

임승천의 조각은 서사구조를 가진 신형상조각이다. 작고한 선배 조각가 구본주가 한국 사회의 이면을 비판적 서사와 풍자로 풀어낸 것을 떠올리게 한다. 임승천은 마치 영화 시나리오를 쓰듯, 혹은 삶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트루기를 구성하듯 조각전시 연출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전시공간 전체를 미학적으로 구조화함으로써 조각이 가진 개체성의 한계를 넓게 확장시킨 것이다.

올해 아트센터 화이트블럭에서 열린 ‘잃어버린 고리’가 묵직한 중편소설을 보는 느낌이라면, 2014년 성곡미술관에서 ‘2013 내일의 작가상’ 수상 기념으로 열린 ‘네 가지 언어’는 단편소설 작품집 같다. ‘네 언어’를 보여주기 위한 그의 옴니버스식 공간연출은 탁월하다. 나와 너, 나와 너들, 나와 나들, 나와 그들, 나와 나라…. 나를 둘러싼 수많은 ‘너나’들은 모두 나를 가두고 옥죄는 폭력사회를 반영하기도 하고, 나에게서 떠났다가 나에게로 돌아오는 신화적 ‘너들(他者)’과 ‘나들(ego)’이기도 하다. 그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돼 있어서 벗어나거나 온전히 떠나갈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는 형상조각을 통해서 이런 심연의 내적 구조를 놀랍도록 생생하게 드러냈다. 그가 구본주예술상 작가로 선정된 까닭은 이렇듯 그의 작품들이 지금 여기 한국 사회를 예리하게 파고들어서 적나라하게 들춰낸 데 있었을 것이다. 미학적으로는 비판적 리얼리즘과 마술적 리얼리즘을 뒤섞은 작품들에서 여전히 방향타를 상실한 채 부유하고 있는 우리 사회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임승천은 2007년 서울의 모로갤러리에서 첫 개인전 ‘정지된 또는 부유하는’전을 열었다. 소설적 허구에 가까운 이야기로 풀어낸 새로운 형상조각이었다. 1980년대 김광진과 류인의 형상조각이 개별적 서사성을 함축했고 그 뒤 구본주의 형상조각이 서사의 장면성을 갖췄다면, 임승천은 더 나아가 전시 전체를 연극적 드라마트루기로 연출한 형상조각을 보여준 것이다. 신의 창조물로서의 인체를 탐구하고 재현하는 데 무게를 두었던 전통적인 구상조각과 달리, 시대와 현실, 역사의 능동적 주체로서 억압·고난·저항·절망·분노·화해하는 인간을 탐색한 형상조각은 1980년대 초반 ‘신구상조각’이란 이름으로 시작됐다. 심정수, 김광진, 박희선, 류인, 구본주를 비롯한 리얼리즘 조각가들에서 그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바로 이 신구상조각이 곧 ‘형상조각’이다. 신형상조각은 그런 신구상의 형상조각론에 마술적 판타지를 뒤섞어 미학적 상상력과 조형적 형상실험, 현실비판의 미의식을 확장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때때로 우화적이고 음울하며 예지적이고 키치적이다. 임승천은 여기에 장편서사를 더했다. 2007년의 전시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판타지’ 항해드라마의 조형적 모험이자 그 시작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의 전시를 그래서 ‘기함프로젝트(Flagship Project)’라고 명명해도 좋으리라. 이야기의 출발에서 끝까지 모든 것의 조형적 상상은 배(船泊)를 중심으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2014년 ‘네 가지 언어’에 다다라 절정에 이르렀고, 그 절정의 한 중편 에피소드가 올해 열린 ‘잃어버린 고리’일 것이다.
 

photo고리 Link, 2014, 혼합재료, 103×16×25㎝, 성곡미술관 설치. 작가 제공



예컨대, 영화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시리즈처럼 그의 신형상조각은 올해를 빼더라도 8년 동안 총 5회에 걸쳐 제작된 ‘단일 서사구조의 형상조각’이었다. 이러한 조각 작업은 현재까지 그 유례를 찾기 힘들다. 물론 어떤 조각가들의 신형상 작품들에서 짙은 서사성이 발견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가적 관점의 일관성을 드러내는 데 불과했다. 그의 드라마트루기는 말 그대로 신형상조각에 대한 극작법이며 극작술이라 할 수 있다. 연극과 희곡에서의 드라마트루기를 그대로 원용한 것인데, 실제로 그는 전시를 위해 시나리오를 먼저 구상한다. 그리고 시나리오에 따른 조각적 연출을 다시 구상한다. 드라마에서의 극작법과 극작술을 그의 조각어법에 맞게 바꾸면 신형상조각 창작법과 신형상조각 공간연출법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창작법’은 시나리오와 구체적 현실의 반영태인 형상조각까지를 동시에 아우른다. 그리고 ‘연출법’은 전시될 공간과 형상조각의 관계가 핵심이다. 그러나 조각에서의 드라마트루기는 영화와 달리 물리적 전시공간의 제약이 크기 때문에 ‘시나리오-조각-공간’의 세 축 가운데 어느 것을 먼저 두지 않고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특히 전시공간은 이미 확정적 절대공간이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서 시나리오의 장면과 조각을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의 드라마트루기는 많은 부분에서 공간에 따른 장면서사로 연출된다.

그의 대표 전시로 손색이 없는 ‘네 가지 언어’를 좀 더 살펴보자. 이 전시의 서사적 장면과 공간구성은 ‘실종(Missing)’ ‘노시보(Nocebo)’ ‘고리(Link)’ ‘순환(Circle)’으로 제시된 옴니버스 섹션 구조를 따랐다. 그리고 각각의 섹션 주제는 8년 동안 이어진 이야기에서 발췌한 주제 장면의 서사를 공개하면서 시작된다.
 

photoDream ship 3, 2008, F.R.P, 180×330×330㎝, 성곡미술관 설치. 작가 제공



시나리오와 공간연출의 서두를 장식하는 ‘실종’의 경우 ‘유랑’을 표제로 part1(표류자)과 part2(꿈꾸는 물고기)가 따라붙는 형식이다. ‘실종’이 네 개의 옴니버스를 구성하는 첫 번째 개념어라면 ‘유랑’은 주제어이고 ‘표류자’와 ‘꿈꾸는 물고기’는 이야기의 실체이면서 동시에 형상조각 대상이 되는 것이다. 가령 ‘유랑’의 서사는 이렇다. “이 이야기는 ‘소외된 이들의 남태평양 표류기’이자 가상의 이야기인 ‘꿈의 배 3(Dream ship 3)’의 마지막 생존자이며, 그다음 이야기인 ‘북위 66도 33분-잠들지 않는 땅’의 제3관찰자로 등장했던 ‘낙타’라는 표류자의 여정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때 미술관은 그의 작품들이 전시되는 전시공간이면서 동시에 각각의 형상조각들이 처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미학적 장소라 할 수 있다. 흰 좌대 위에 걸터앉은 ‘낙타’라는 ‘표류자’의 장소는 그러므로 검푸른 바다 위에 떠 있는 폐허로서 ‘꿈의 배’이다. 서사에 따르면 그는 이 배의 마지막 생존자다. 왜 임승천은 이 마지막 생존자의 이름에 ‘낙타’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게다가 상실의 흰 날개, 세 개의 눈, 날개를 먹은 물고기가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 임승천의 서사와 신형상조각들의 형상들은 우리 사회의 안개에 휩싸인 미래적 징후들을 예지한다.

라오서(老舍·1899~1966)의 소설 ‘낙타샹즈(駱駝祥子)’에서 ‘낙타’라는 인물은 그늘진 초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한국인들과 너무도 많이 닮아 있는데, 나는 본능적으로 임승천의 ‘낙타’와 라오서의 ‘낙타’를 동일시하며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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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장성규는 그의 평론집 ‘사막에서 리얼리즘’(2011)에서 지금의 후기자본주의를 ‘사막’에 비유한 바 있다. 그리고 그는 이 사막을 가로질러 건너가기 위한 문학적 예술론으로 주저 없이 ‘리얼리즘’을 꼽았다. 이러한 장성규의 문학비평이 묘파하고 있는 지금 여기의 현실과 그 리얼리즘의 형체를 조각적으로 재현하는 곳에 나는 임승천의 ‘낙타’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막의 낙타에게 있어서 사막은 자신의 혹을 태워가며 견뎌야 하는 생사의 현실이다. 또한 비열하기 짝이 없는 투쟁의 장소이자 멈추기를 허락하지 않는 무한 걷기의 현기증이다. 이런 낙타의 삶에 빗대어서 임승천은 후기자본주의의 사막을 역설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종길(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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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승천 작가는

임승천 조각가는 1973년생으로 수원대 조소과를 졸업했다. 2001년 한국 구상미술대전과 관악현대미술대전에서 특선하며 특유의 조각적 ‘형상성’을 인정받았다. 2007년부터 서사적 스토리를 가미한 새로운 형상조각을 통해 한국 사회의 부조리와 안개에 휩싸인 미래상을 징후적으로 표현해 왔다. 2010년 국립미술창작스튜디오 입주 작가, 2011년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입주 작가로 활동했고, 그의 작품들은 경기도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93뮤지엄 등에 소장돼 있다. 현재 K-스컬프처(Sculpture)와 서울시가 함께 주최하는 대규모 야외조각전 한강조각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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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munhwa.com/news/view.html?no=2023100601032212000001

 

[조각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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