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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강철 파내고 깎은 인고의 불질… 슬픔·관계 새기며 ‘존재의 이유’ 탐닉 (이성민 작가)
  • 게시일 : 202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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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이성민 ‘피에타(Pieta)’, 2015, 80×65×200(h)㎝, 철. 크라운해태 제공



■ 세계로 가는 K-조각의 미래 - (6) ‘강철’을 조각하는 이성민

산소절단기 이용 극한의 작업
고행 넘어 초월적 수행자 면모

가족·지인 죽음에 영향받아
‘레이서’ ‘봄의 소리’ 등 작업

세월호 연상 ‘침묵의 바다’ 등
근래 비정형적 추상작업 절정

photo안진국(미술비평가)

예술가의 작업복은 뜨거움으로 젖어 있다. 불을 다루는 작업은 우리 예상보다 훨씬 뜨겁다. 작업복을 물에 담근다. 어쩌면 여기서부터 작업의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두꺼운 작업복은 물을 빨아들이며 점점 무거워진다. 무거워진 작업복을 입고 마스크를 쓴다. 다시 한 번 샤워기로 작업복에 물을 적신다. 이제 작업을 위해 그리 넓지 않은 컨테이너에 들어간다. 그곳에는 작업하면서 생긴 상흔으로 가득하다. 있는 거라곤 산소통과 낮게 매달린 산소절단기, 테이블, 선풍기, 몇 가지 작업 용품뿐이다. 이곳저곳에는 철이 녹으면서 눈물처럼 한 방울 한 방울 뚝뚝 떨어져 굳어진 쇳물들이 흩어져 있거나 쌓여 있다. 작가는 축축한 작업복을 입고, 수천 도에 달하는 산소절단기로 무거운 철 덩어리에 불길(火道)을 낸다. 이 뜨거운 시간을 견디며 단단하고 견고한 철의 표면을 불로 깎는다. 선풍기 바람이 젖은 작업복에 닿으며 불이 뿜는 열기를 조금 식혀주지만, 잠시일 뿐이다. 40~50분간의 불 작업은 젖은 작업복의 물기를 마르게 하지만, 목덜미와 등에서 나는 땀이 다시 작업복을 적신다. 열기가 확 밀려올 때면, 물에 젖어 축축하고 무거웠던 작업복이 그리워진다. 이것이 더운 날 조각가 이성민의 작업 풍경이다. 작가는 이제 이렇게 작업하는 것이 익숙하다고 말한다. 이런 작업 시간들이 쌓여 그의 경이로운 철의 예술이 탄생한다.

이성민은 불로 철을 깎는 작업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짧은 문장으로 그의 작업을 압축하는 것은 사실일지언정 진실은 아니다. 작가가 고행을 넘어서 초월적 수행자처럼 작업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을 만져보기 전까지 그것이 얼마나 무겁고, 차갑고, 단단한지 알기 힘들다. 산소절단기를 사용해 보지 않으면, 검고 육중한 철에 불길을 내는 것이 얼마나 뜨겁고, 위험하고, 어려운 일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 이성민이 산소절단기를 철에 가져가면, 차갑고 단단한 철은 작은 불꽃을 피우며 금세 오렌지빛으로 달아오르고, 어느새 눈물방울처럼 녹아내린다. 그러는 사이 하나의 선, 하나의 불길이 철에 새겨진다. 그렇게 붉게 피어났다 사그라진 철의 상흔이 수백 개, 수천 개가 쌓였을 때 비로소 하나의 형상이 세상에 나타난다. 하나의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한 그의 초월적 수행은 감히 상상하기 힘들다. 작가의 축축한 작업복과 선풍기의 더운 바람, 흘러내린 땀방울,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체득한 손놀림을 떠올리기도 쉽지 않다. 인고의 시간을 견디며 쇳덩어리를 불로 깎고 또 깎아 만들어 낸 형상을 눈앞에서 볼 때, 이성민의 손과 시선이 머물렀을 수많은 파인 선을 바라볼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숭고한 감정이 일어난다.

인고의 불질은 이성민의 작업을 특별하게 한다. 그렇다고 그의 작업을 단순히 인고의 불질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작업에 내재한 인간의 존재론적 질문에 눈감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작가는 ‘슬픔’과 ‘관계’를 통해 인간의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그는 검고 육중한 쇳덩어리에 생의 슬픔을 새기고, 존재의 관계를 이으며 인간의 형상을 조형한다. 그 가운데 ‘인간은 무엇인가’를 거듭 질문한다. 이성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슬픔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주변에서 일어난 슬픔을 마음에 담고, 우리 사회가 겪은 아픔을 기억에 새긴다. ‘슬픔’과 ‘관계’가 이렇게 그의 작업에 들어온 것은 대학 시절 솔메이트처럼 함께 다녔던 동료의 죽음이 큰 계기가 된 듯하다. 이 시기 이성민은 죽은 동료의 흔적을 따라 작업했다. 고인이 유품처럼 남긴 색연필로 그린 새 드로잉은 새 조각 작품 ‘버드(Bird)’ 연작으로 이어졌고, 고인이 했던 사진 작업의 ‘레이서’라는 제목은 뛰는 말을 조각한 ‘레이서(racer)’ 연작이 나오는 배경이 됐다. 가족과 지인 등의 두상을 만드는 작업도 이 죽음 이후 주변 사람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무의식이 잠재된 것처럼 보인다.
 

photo2023 한강조각프로젝트(뚝섬 한강공원) 출품작인 이성민의 ‘깃털-곤’, 2021, 철. 크라운해태 제공



죽은 동료가 천국에서 그를 응원해 준 걸까. 고인을 애도하며 했던 작업들은 벨기에 미술 애호가 얀 스틴브뤼헤(Jan Steenbrugge)의 눈에 띄어 벨기에 전시로까지 이어졌다. 작가는 동료의 죽음이 계기로 시작한 ‘버드’ 연작을 2010년 여름에 연 두 번째 개인전에서 선보였다. 이때 한국에 잠시 여행을 왔던 스틴브뤼헤가 무심코 전시장에 방문했다가 그의 작품에 감동해 3점을 구매했고, 2011년에 벨기에로 초청해 겐트의 게우첸후이스(Geuzenhuis)에서 10일간 개인전을 열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줬다. 전시를 본 벨기에의 많은 사람이 그의 작품에 감탄했다. 그곳에서의 개인전은 한국에서 연 두 번째 개인전과 다르게 동료가 그린 새 드로잉과 그 드로잉을 입체로 만든 자신의 조각 작품이 나란히 전시돼 눈길을 끌었다. 사연을 아는 사람은 친한 사람을 잃은 슬픔과 그 사람을 잊지 못하는 관계를 떠올렸을 것이다.

‘슬픔’과 ‘관계’는 이성민의 인간 형상과 관계 깊다. 그는 작업 초기부터 근래까지 신체의 움직임을 탐구하고, 가족과 지인의 모습을 조각으로 남기는 등 인간 형상에 관심을 뒀다. 이는 그의 심층에,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의문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춤을 추는 인간 형상이나 팔과 다리, 머리 등이 없는 신체 형상, 혹은 발과 같은 특정 신체 부위만을 보여주는 조각 작품은 인간 일반의 존재에 관한 탐구로 읽힌다. 그리고 자녀나 지인, 혹은 자신 등 특정 인물을 모델로 제작한 조각상에서는 자신의 존재와 가족 및 지인 간의 관계가 형성하고 있는 존재론적 그물망을 끊임없이 탐색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일례로, 많은 조각철을 깎고 이어 붙여 만든 ‘피에타(Pieta)’(2015)는 아버지가 서서 아이를 안고 있는 조각상으로, 부성과 관계의 믿음에 초점을 맞춘 작업이다. 이 조각상의 아이는 작가의 어린 딸의 모습이 모티프가 되었는데, 아빠에게 안겨 있지만, 자칫 떨어질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전혀 힘을 주지 않고 축 늘어져 있는 모습에서 관계가 만든 믿음과 신뢰를 봤다고 한다. 바로 아빠가 꼭 안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떨어트리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 말이다. 다른 예로, ‘봄의 소리’(2017)는 작가의 자녀와 같은 또래인 친척 조카를 생각하며 제작한 작품이다. 작가가 자신, 친척들, 그리고 자녀와의 관계를 곱씹으면서 불의의 사고로 죽은 조카를 애도하기 위한 작업이다.

근래 들어 작가는 추상적인 조형 작업을 자주 선보이고 있다. 그 본격적인 발화는 아마도 검고 무겁고 차가운 바다를 연상시키는 ‘침묵의 바다’(2014)로 보인다. 잊지 못할 아픔으로 남은 세월호 사건이 모티프가 된 이 작업은 수평으로 불길을 낸 20×20㎝의 정사각형 철판 529개를 이어서 만든 평면 작업이다. 이 작업은 바다를 연상시킨다는 면에서 재현의 어법이 남아 있지만, 조각의 특성인 입체성을 포기하고 평면성을 강조한 것이나, 수평적인 선들로만 구성된 면모에서 작가가 추상의 세계로 한 걸음 들어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작업 이후 ‘슬픔’(2020)이나 ‘외로움’(2020) 등 다양한 형식의 추상 조각 작업이 등장했다. 최근에 선보이고 있는 ‘곤’ 연작으로 그의 추상 작업은 절정에 올랐다. 곤 연작은 마치 수술실에서 수술하듯 긴 쇠기둥의 중심부를 불질로 가르고, 가르는 사이에 녹았던 쇳물이 자연스럽게 굳어진 곳을 또 가르고 하는 행위를 반복해 형상을 만들어 가는 작업이다. 2022년 포항스틸아트페스티벌 때 설치했던 ‘깃털-곤’은 깃털의 형상을 구현함으로써 구상성과 추상성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올해 선보인 ‘곤’은 완전하게 비정형적인 추상 형식으로 추상 작업의 절정을 보여준다.

이성민은 조각 작업 외에도 자연에 나가서 사생 드로잉을 하고, ‘하트 공동체’를 꾸려 퍼포먼스와 영상 촬영을 하는 등 다채로운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것은 작가의 새로운 사유와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의 밑거름이 된다. 나는 이성민의 폭넓은 시선이 불러올 작업을 뜨거운 마음으로 기다린다. 안진국(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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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민 작가는

산소절단기로 강철을 깎아 조각하는 작가다. 1975년생인 작가는 서울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서울시립대에서 환경조각학을 전공했다. 2003년부터 전시를 시작해 개인전 12회와 50여 회의 국내외 단체전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특히 2011년에는 미술 애호가 얀 스틴브뤼헤의 초청으로 벨기에 겐트의 게우첸후이스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현재 현대공간회와 서울조각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서울대와 서울예술고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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